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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中 金忠顯 선생과 한글 서예 정신
mseoyeadb 2007/01/17, 조회수 : 6766
松民 李 周 炯 (京畿大學校 傳統藝術大學院 講師·월간서예 포럼 주간) 들어가며 일중 김충현 선생께서 얼마 전 85세로 타계하셨다. 선생은 일곱 살 때부터 한학자 집안에서 경학과 서예에 몰두하시어 타고난 필재와 공력으로 꺼져가는 서단을 바로세우시고 20세기를 마감하셨으니 서예의 길을 가고 있는 후인으로서는 아쉬움과 애통함을 금하지 못하겠다. 필자는 1981년 당시 출판된 『일중서집』을 구하면서 처음으로 일중선생의 작품세계를 널리 알게 되었는데, 眼底手卑한 청년으로서는 작품의 깊은 예술성을 뚜렷하게 이해 할 수가 없었으나 서품에서 풍겨오는 깊은 雅趣만큼은 마음속에 깊이 파고들었다. 25년을 지나오면서 발길과 눈길은 주변을 맴돌았고 글씨에 대한 천착과 서론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질수록 더더욱 옭아져 갔다. 이에 필자는 25년이 지난 지금 다시 선생의 유훈과 묵적을 살피면서 일중선생의 서예술 사랑을 짚어보면서 재배하고자 한다. 그 중에 한글에 대한 명칭과 방향성 제시는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혼란한 명칭의 문제와 서예공부의 방향에 龜鑑이 될 것이라 생각되어 평생 동안의 서예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신 『藝에 살다』1)라는 책과 선생의 서집인 『일중서집』을 인용하여 써 보고자 한다. 내가 한글을 쓰는 것은 내일은 내가 해야 되겠다. 대가의 서예사랑은 국문서예에서 시작되었다. 선생께서는 어려서부터 누구보다도 먼저 우리글 우리글씨에 대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시고 고금의 서법을 종합하여 국문서예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보이셨다. 예술역정을 모두 다 헤아리기는 어렵지만, 서집이나 문집을 통하여 대강을 살펴보면 누구도 一文一書로서도 萬感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선생께서 국문글씨에 열정을 나타내실 때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 하에 있었으니 아마도 국문을 대하는 것만큼은 失國의 한을 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은 일중선생에게 오히려 에너지로 변하게 되었고, 주변에서 시의에 맞지 않는 공부라고 하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력을 쏟게 되었을 것이다. 얼마 후 광복을 맞이하게 되자 교과서, 전람회, 비문 등 우리민족의 얼을 되살리는 작업이 한꺼번에 밀려오게 되었고, 식민지 하에서 출간하지 못하였던 『우리 글씨 쓰는 법』이 출간되었다. 국권을 잃은 국난의 시기에 국권회복과 민족자존을 위해 단결할 수 있는 힘은 민족정체성이 뚜렷한 국문의 힘에서 나온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은 당시 항일 운동가였고, 양명학자, 실학자, 역사학자, 국학자였던 정인보 2) 선생에게도 신의를 얻어  21살 되던 임오년(1942년) 팔월에 책의 서문을 받았다. 정인보 선생은 49세였다. 그러나 그 때는 하도 국문탄압이 심하여 원고만 가지고 있다가 광복 후에 즉시 출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일중 선생은 『우리 글씨 쓰는 법』의 책을 간행하게 된 동기를 두 가지로 밝혔다.  첫째는 서예가로서, 국민으로서의 책임감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자료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내가 한글 글씨를 쓰게 된 것은 두 가지 연유가 있었다. 먼저 내 일은 내가 해야겠다는 것이고 그 다음엔 우리 집에 전해오는 궁체가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말하기를, 글씨에 있어서 우리는 힘이 갑절 든다는 것이다. 중국 사람이라면 그들의 한문만 잘 쓰면 되지만은 우리는 그 외에 자국문자가 있으니 이것도 잘 쓰려면 두 글씨를 다 잘 써야 구비하여 쓴다고 보겠다. 그래서 이른바 국한병진주의(國漢倂進主義)를 내세우려고 한다. ……쓰다 보니 어떠한 체계를 세워야 공부하기에 편리한 것을 깨닫게 되어 약관의 나이로 모든 것이 미숙하지만 책을 하나 엮었다.『우리 글씨 쓰는 법』이란 책이었다.(『藝에 살다』) 광복의 흥분은 민족혼이 담긴 우리 글씨 사랑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국문서예에 대한 깊은 고찰을 하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글씨 공부에 뜻을 두고 오늘에 이르렀다. 특히 국문 글씨에 힘써야 할 것을 느껴 공부도 하고 한편 젊어서 이에 관한 책도 엮어 보았다. 이 때는 일제의 식민정책하(植民政策下)이었다. … 그 당시에는 옆에서 보는 이 중에 시의에 맞지 않는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도 있었다. … 뜻밖에 광복(光復)이 되지 않았는가. 이제는 그 버림받다 싶던 우리글을 써야겠고 글씨도 써야 한다.… 이 모든 일이 예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일본색은 진저리나던 끝에 말끔히 쫓아버려야겠고 본래의 서법을 발휘해야겠다. …이는 대체로 한문 글씨에 관한 일이었고 국문 글씨는 다른 문제였다. 국문 글씨에야 왜색이 깃들리 있겠는가.  나는 그 당시 나이도 젊었지만 옳다! 배운 것을 인제야 쓰게 되었구나 하고 내심 무한히 기뻤다. 그러니 심혈을 기울여 일하지 아니 할 수 없었다. (『藝에 살다』) 한글서예의 부족감을 고체에서 찾다 국문의 서예는 고전 자료를 살펴보니 많은 서체가 구비되어 있었다. 한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서체가 완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문의 전서와 예서에 해당되는 『훈민정음』과 『용비어천가』, 해서에 해당되는 판본류가 있었다. 민간인들이 주로 썼던 글씨를 살펴보니 예술적 가치가 있는 정형화된 서체는 보이질 않았지만 그것은 궁체에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해서 행서 초서에 해당되는 서체들이 모두 궁체에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중선생은 여기서 만족할 수가 없었다. 궁체를 연구하다보니 서예에서 요구되는 질박 고졸함은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다.   궁체만 써보니 이것만으로는 좀 부족한 감도 없지 않고 또 무엇을 연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고판본(古版本)의 자체와 기원까지도 더듬어 보려고 하였다. 훈민정음 원본의 글씨를 보면 과연 고전(古篆)의 기원설이 부합된 것을 알겠고 『용비어천가』나 『월인천강지곡』의 자체도 살펴보면 얼마든지 그 글씨로서 발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여 전. 예의 필법으로 그 자체를 본령삼아 써 보니 조형미를 내포하여 좋게 보였다. (『藝에 살다』) 일중 선생은 國漢을 함께 공부하면서 느낀 것은 국문서예에 대한 부족감이었다. 한글서예는  연미한 궁체가 국문서예를 대표하는 것으로 흘러가자 자체의 원류로 거슬러 올라가 훈민정음이나 용비어천가등에서 篆隸의 법을 찾고자 하였으며, 이것을 또 실제 전예와 응용하여 작품으로 해냈다. 한문서예는 고전(대전)에서 원점과 원필의 획이 세월이 흐르면서 서체가 秦漢시기에 이르러 원점이 짧은 방획으로 변하고, 기필처에 斬釘(못의 머리를 자른 모양)의 형태가 나타나는 예서로 발전한 것처럼, 훈민정음도 비록 창제당시 모음이 天·地·人의 삼재를 근거로 하였다 하더라도  천에 해당되는 모음의 ‘●’이  ‘   ’이나 ‘   ’ 의 모양과 같이 짧은 획으로 변하게 되는 것만큼은 인정하였다. 그것은 ‘백성에게 편리하게 하고자 하는’ 훈민정음 창제정신에 순하는 일이며, 자연스런 실용적 서사과정이었다. 여기에서 일중선생도 전·예·해·행·초의 오체가 국문한글에서도 구비되어 있음을 확신하였던 것이다. 위당(정인보)선생도 마찬가지의 뜻을 피력하였다. 이런 글자들이 역사를 흘러 내려오며 여러 사람들의 손을 지나 비로소, 필법(筆法)이 생기니 '정자(正字)' '흘림'의 두 체로 예컨대 중국의 진한(秦漢) 이래 '예서(隸書)'와 '해(楷)' '초(草)' 가 있게 된 것과 같다.…… 궁체는 그대로 특수한 필법이 있으나 고체는 한자식(漢字式) 필법으로 써야하니 이것이 다를 뿐이다. 한자의 전·예(篆·隸)를 써야만 한글의 고체를 쓸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궁체에는 정자와 흘림이 있어 한문의 해·행·초서에 해당되고 고체는 저절로 전·예서에 해당되는 것이라 할 수 있어 결국 오체가 구비한 우리 글씨라 할 것이다. 그리고 궁체가 여성적이라면 고체는 남성적아라고도 형언할 수 있다. ( 김충현 『藝에 살다』 범우사. 1999) '위당'이 분석했듯, 우리의 글씨도 한자의 '전-예-해-행-초' 5체와 같이 쓸 수 있다는 것은 이 같은 근거로 주장되는 것이다.(『藝에 살다』) 선생은 궁체에 대하여 국문서체의 대표적인 서체로 인정하였다. 즉, 국문이 한자서예에 밀려 좀처럼 서예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였는데, 다행스럽게 뒤늦게 궁인들을 중심으로 서체가 정립되고 유행되어 한문의 해·행·초에 비견될 만한 서체가 생겨나게 되었다고 보았다. 이로써 우리도 한문의 오체에 비견되는 서체가 있다는 것이었으며, 이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궁체의 예술적 발전 가능성은 크게 보지를 않았다. 그것은 단순한 획과 천편일률적인 결구·장법이 서사자의 개성을 나타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궁중에서의 서사생활은 다른 궁중의 법도와 마찬가지로 엄격한 법도에 의하여 一毫도 소홀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감성을 절제하고 이성적인 서사 활동만이 통할 수 있었을 뿐이며, 개개인의 성정에 따른 尙意的인 글씨를 상상하고 창작해 내기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조선후기 궁체를 임서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이성주의로 임해야만 가능하다. 일중선생은 이러한 궁체에 대하여 예술로서의 부족감을 느낀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궁체가 전적으로 개성을 나타낼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전반적인 조선조 후기 궁체의 바탕은 한문의 해·행·초에 근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서법의 본령이 분명하게 살아 있다. 문제는 한문에서의 근골이 서 있는 상태에서 가능한 것이지 만약 궁체로 곧바로 들어가게 된다면, 골기가 결여된 연미함만이 남게 된다. 이러한 병폐는 오랜 시간동안 지속되어 왔고 앞으로도 지속되어 갈 것 같아서 씁쓸한 마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혹자가 만약에 ‘한글은 나름대로의 미가 있다’, ‘한문을 쓰면 한글이 버린다.’고 하는 주장은 “閨房之女”의 편견이라고 할 수 있다. 궁중 밖을 나와 본 사람만이 궁중 밖의 사정을 아는 것이다.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일중선생은 국문자 서예에서의 최선의 방법은 훈민정음과 용비어천가를 연구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러한 서체를 “고체”라고 명칭하고 연구에 박차를 가하셨다.   궁체만 써보니 이것만으로는 좀 부족한 감도 없지 않고 또 무엇을 연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고판본(古版本)의 자체와 기원까지도 더듬어 보려고 하였다. 훈민정음 원본의 글씨를 보면 과연 고전(古篆)의 기원설이 부합된 것을 알겠고 『용비어천가』나 『월인천강지곡』의 자체도 살펴보면 얼마든지 그 글씨로서 발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여 전·예의 필법으로 그 자체를 본령삼아 써 보니 조형미를 내포하여 좋게 보였다. 나는 이 글씨를 고체(古體)라 일컬었다. 우리 글씨로서는 가장 예로운 글씨이기 때문이다.(『藝에 살다』) 전예의 필법을 갖춘 한글서체를 “고체”라고 명칭 일중선생이 “고체”라고 명칭한 이유는 “고전의 기원설에 부합되었다”는 것과, “전예의 필법으로 그 자체를 본령삼아 쓰게 되니 조형미가 내포되었다.” “우리 글씨로서는 가장 예(古)로운 글씨이다”라는 이유였다. 그중에서도  “전예의 필법으로 쓴 글씨”, “가장 오래된 글씨”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어떤 사람들은 “판본체”라고 까지 명칭하기도 하는데 판본체라는 말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판본체라는 말이 유행하게 된 것은 선생께서 “그러나 궁중에서 이루어진 궁체가 있어 정자와 흘림 두 체가 성립되었고 광복 후 『훈민정음』을 비롯하여 『용비어천가』·『월인천강지곡』 등의 고판본체를 본따고 전·예의 필법을 이끌어 써 보니 고아하여 훈민정음 제자원리도 상부(相符)할 뿐 아니라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열매를 맺었다 하겠다. 나는 이 글씨를 고체(古體)라 일컫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藝에 살다』) 라고 한 것이 잘못 이해되어 전해진 것 같다. 따라서 일부 사람들이 판본체=고체로 인식하여 가르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서체분류상에 혼동만 가져올 뿐이다. 일중선생이 명칭한 고체란 즉, 전·예에 해당되는 『훈민정음』이나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등과 같이 기필이나 수필처가 圓 또는 斬釘의 형태로 갖추어진 글씨를 말한다. 일중 선생이 명칭한 고체는 한문의 전서와 예서와 같이 필력을 구사하는데 있어서 손색이 없다고 보았다. 다만 예서와 같이 파책을 사용하는 것은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았다. 우리 글자로 현판(懸板)도 써야 하고 비문(碑文)도 새겨야 하며 작품도 해야 하니, 연약해 보이는 작은 글씨 위주의 '궁체'로만 만족할 수는 없지 않은가. '고체'는 글자의 크기를 막론하고 필력을 구사할 수 있으니 이 '체(體)'의 개발과 무궁한 발전이 기대되는 것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전 . 예'의 필법으로 쓰는 것이라 하였지만 '고체(古體)'와 '전(篆)'을 곁들여도 별맛이 없고, '예서'도 '파책(波책)'을 하여 곁들여도 볼품이 없어 '전'도 권량문자(權量文字)의 '자체'나, '예(隸)'도 '파책' 없는 '자체'를 혼용하면 좋을 것 같다.『藝에 살다』) 이러한 고체연구는 국문 국문서예 발전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며, 우리고유의 문자가 한문의 서예와 견줄만한 세력의 구사는 고체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고체를 쓰되 원윤한 전서를 그대로 쓰게 되면 별 맛이 없고, 예서의 파책을 사용하여도 볼품이 없으니 전서와 예서의 중간부분인 秦代의 전서나, 파책이 없는 古隸의 획을 쓰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이에 해당되는 우리나라의 고구려 『광개토경호태왕비』와 같은 고예의 형태를 사용하여 고체를 쓰기를 즐기는 서가들이 많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화려함 보다는 장중한 미를 선호하는 민족성을 지닌 탓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정인보선생도 일중선생의 『우리글씨 쓰는 법』의 책 서문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훈민정음을 비롯하야 월인천강지곡을 날(經)로 한 석보상절 같은 배 가장 뚜렷하니 문자 예 롭고 장중하야 태를 아니 보이고 규구로만 쓰 온 전차로 저 은주 고전과 같아 부르고 빤 획이 없고 삐치고 어슷하는 모양을 만들지 아니하였더니…”(『藝에 살다』) 이 말을 정리하면 고체는 “예스럽고 장중하다”, “맵시를 보이지 않고 규구로만 썼다.”, “은·주 고전과 같아 배가 부르거나 홀쭉함이 없다.” “삐치고 한쪽으로 삐뚤어진 모양을 만들지 않았다” 고 보았다. 이것은 바로 우리민족이 현란한 아름다움보다는 그윽한 장중미를, 기교적인 미 보다는 자연스런 미를 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우리 민족의 근본을 “단군조 이래 5,000년간 맥맥히 흘러온 얼”에서 찾고 조선역사는 곧 한민족의 “얼의 역사”임을 강조했던 역사관에 기인한 것이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우리문자의 정체성을 연구해야 될 것으로 믿는다. 우리문자는 정인보 선생의 관점과 같이 우리 민족은 그야말로 5000년의 맥맥히 흘러온 얼을 지니고 있다. 그 얼은 단군에서 고조선을 거쳐 고구려시기에 고박 중후함으로 광개토경호태왕비에 집약되어 있다. 고체는 바로 이러한 선질을 사용할 때 가장 우리 민족이 선호하는 미감이 나타날 것이며, 우리가 좀더 적극적, 구체적으로 연구해 나간다면 아름다운 혼을 간직하고 있는 한국 서예의 미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글서예가 발전하는 길은 국한 혼용 일중선생은 國漢 竝進主義를 내세웠다. 중국 사람이라면 그들의 한문만 잘 쓰면 되지만은 우리는 그 외에 자국문자가 있으니 이것도 잘 쓰려면 두 글씨를 다 잘 써야 구비하여 쓴다고 보겠다. 그래서 이른바 국한병진주의(國漢倂進主義)를 내세우려고 한다.(『藝에 살다』) (한문서예와 국문서예의) 두 갈래의 길이라 하겠으나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어 그렇게 어렵게만 생각하지 않아도 좋다. 누구나 실지로 써보면 다 가능한 것을 알게 되고 체험으로 별다른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특히 젊은 학도들에게는 더욱 가능한 것이며 우리로서는 반드시 두 가지 글씨를 다 교육하여야 할 것을 강조하는 바이다. 서예의 근원과 필법의 정통이 한자에 있느니 만큼 이 글씨를 배우지 않고 서예를 말할 수 없는 것이며 국문은 우리의 고유문자이니 이 글씨를 우리가 배워 익히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藝에 살다』) 서예라는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한문서예와 한글서예라는 것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서예에는 기법 면에서 다양한 용필·결구·장법이 있으므로 그것을 응용해서 문자에 적용하여 쓰면 되는 것이다. 한문서예에서는 다양한 서체에 따른 용필법이 있으니 서예라는 측면에서 보면 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글의 단순한 자모음으로 다양한 선을 표현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도, 정형성을 갖추기는 것만큼은 매우 간편하다. 고체, 궁체, 또는 언해류에 보이는 활자체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렇지만 서예라는 측면에서는 다양한 선질과 결구·장법의 변화가 요구된다. 이러한 서예적인 요구를 좀더 발전시키고 선질과 결구·장법에 있어서 한문서예에서 찾아본다면 많은 발전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사실 한글서예가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해 나간다면, 쓰기 쉽고 읽기 쉬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마치면서 일중선생은 일제강점기 항일가문에서 태어나 주변에 민족의식이 뚜렷한 주변 義人들에게서 참된 민족정신을 길러 왔을 것이다. 선생의 그러한 청년 정신은 고스란히 한글서예에 배어들었고, 그 내재된 정신은 그대로 평생 동안 서예에 나타나게 되었다. 누가 보아도 일중선생의 한글은 조선시기의 단아하고 편안한 궁중규방의 모습이 아니라, 총칼에 대항하는 투사가 거친 서까래를 들고 서 있는 모습 같기도 하다. 이것은 바로 선생이 좋아하던 안진경의 글씨를 공부하면서 글자의 형태를 따라 공부한 것이 아니라 『제질문고』와 같은 글씨에서 나타나는 비분을 토로하고 있는 것 같다. 선생은 마치 예술창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깊은 감정을 서술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그렇지 않은가? 서예에서는 감정이 글자에 전달되면 형태의 끝은 있게 되지만, 정신은 무궁하게 된다. 비록 한글의 단순한 자모음이라고 하더라도 그 주경함은 篆?와 같고 혹은 돌에 새겨진 것 같기도 하여, 강건한 기개로 나타난 글자는 사람들에게 심미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청대에 유희재가 말한 “書如其人而耳”는 바로 이러한 글씨를 보고 하는 말일 것이다. 세종대왕이 백성들에게 누구나 문자생활을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창제하신 훈민정음 정신, 일생동안을 통하여 이를 아름답게 쓰게 하고자 하는 미학정신은 함께 후인들에게 길이길이 빛나게 될 것이다. 1) 김충현 『藝에 살다』 범우사. 1999 2) 1893년~?. 조선 말기 영의정을 지낸 원용(元容)의 4대손. 대한제국 말기의 양명학자인 이건방의 문하에서 경학과 양명학을 공부했다. 1910년 상하이[上海]·난징[南京] 등지를 왕래하면서 홍명희·신규식·박은식·신채호·김규식 등과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동아일보〉에 연재한 〈5천년간 조선의 얼〉에서 조선역사 연구의 근본을 '단군조 이래 5,000년간 맥맥히 흘러온 얼'에서 찾고 조선역사는 곧 한민족의 '얼의 역사'임을 강조했으며, '국학'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고 국학연구의 기초를 '실학'에서 찾았다. 주자학자들의 공리공론과 존화사상을 없애고자 유학의 개혁을 주장했고, 지행일치(知行一致)의 〈양명학연론 陽明學演論〉(1972)을 펴냈다. 8·15해방 후 우익 진영의 문인단체인 전조선문필가협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으며, 1947년 국학대학 학장, 1948년 초대 감찰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6·25전쟁 때 납북되어 묘향산 근처에서 죽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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